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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Book_지지 않는다는 말 written by 김연수

유명 소설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싶어 지른 책

'지지 않는다는 말'



자주 들르는 커뮤니티에 김연수 작가의 글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쓰면서도 마음 속에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글을 좋아하는데

'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에 부합하는 산문집이다.

솔직담백한 글 속에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상황을 내 통제 하에 두려고 부단히 애쓰느라 힘이 들었던 2017년의 여름 한 계절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 이별할 것이 겁이 나서 아예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거나, 이 세계는 고통에 가득 차 있으니 미리미리 그런 고통을 피해서 살아 가고 싶은 생각은, 아직은 없다.
    그보다 나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세계를 원한다. 더 좋은 존재여서 나를 감동시키거나, 더 나쁜 존재여서 내게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한 세계가 아직은 내가 원하는 세계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는 나의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희로애락의 고통을 피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지복의 삶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건 복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감각이 잠든 삶이리라. 감각이 잠들면 우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는 디오니소스 1세처럼 인생의 진리, 즉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삶의 사소하나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무시하고 굵직굵직한 것들의 꽁무늬만 쫓아다니다가 결국 후회하면서 죽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 노래는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두 곡의 노래를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하나, 단 하나뿐이다.

  • 하지만 짧게 빠지는 바람에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듣던 시절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행가를 나는 좋아한다. 영원과는 거리가 먼, 곧 잊힐 노래라서. 그럼에도 바로 그 이유로 영원히 기억에 남으므로.




  •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가 중간을 지날 즈음에는 이걸 다 번역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젊은 내가 하기에 너무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삶. 그때 나는 다른 삶을 생각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이것 말고 다른 삶이 존재할 것 같았다.

  • 하지만 어쨌든 여름은 지나갔다.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 마치 평생 남들에게 들려줘야만 하는 이야기의 총량을 정해 놓고 태어난 사람처럼, 하지만 그동안에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그 양을 채우지 못해서 초조해진 사람처럼. 날이 갈수록 두 분은 점점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도시에 공급하는 고독의 가격을 낮춰 주기를
  • 그러다가 어느 곁엔가 이 우주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 순간 나는 고독을 경험했다.
    고독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 도시에는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는 나보다 일찍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도시에서 나는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은 사막에서 별들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고독에 비하자면 얼마나 저렴한 감정인지 모른다. 이 저렴한 연민은 나를 자만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나마저도 그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리라. 
    이 모든 게 환한 밤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별빛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이 너무나 비싼 감정이 됐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도 고독의 가격이 낮아지기를 바란다.
  •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겨울다운 겨울에 우리는 우리다운 우리가 된다.

  •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린 애당초 그렇게 생겨먹었다.

  • 어쨌든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로 그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 사람은 덜 산 사람처럼 호기심이 많고, 덜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 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인 눈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이 되는 듯하다. 내리는 눈이 아름다운 줄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쌓이고 났을 떄, 일어나는 일도 잘 알고 있다. 눈이 내린다고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게 바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생각. (...)
    앞으로 찾아올 힘든 시절을 좀 덜 힘들게 살기 위해서 지금의 행복을 보험금으로 지불한다. 굴곡 있는 인생보다 평탄한 인생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 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행복과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 어쨌든 질문만이, 오직 근본적인 질문만이 영혼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한계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영혼이 깃든 대답을 하듯이 말이다. 그 반대의 세계는 무제한을 장려하는 사회다. 무한한 소비, 무한한 정보, 무한한 인맥....... 무한이란 아마도 죽고 난 뒤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한한 소비와 정보와 인맥에 둘러싸인 사람이란 아무리 뭐라고 물어도 대답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지금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 그때 나는 깨달았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혼자에겐 기억, 둘에겐 추억)

  •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 대게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 일단 끝까지 달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다. 도중에 포기하면 완주했을 때보다 더 몸이 아프고 기분이 나빠진다.

  • 성격과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에게서 아주 많이는 말고, 조금만 다르게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배우는 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나를 바꾸는 일에는 능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변하는 일은 늘 환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비슷한 인류를 늘 사랑했다.

  • 고문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자들이라면 결국 변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은 바뀌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남는 찌꺼기 같은 게 있다. 그 찌꺼기 같은 게 고통으로 변심한 자들을 구원한다. (...) 인간들이 모두 변하고 난 뒤에도 찌꺼기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얼룩 같은 게 우리를 구원한다. 그걸 일러 영혼이라 할지도 모른다.

  • "설거지를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냄비와 그릇들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요리는 고급 예술이다." (...)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절망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인간으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삶은 고급 예술이다.

  •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공연을 볼 수 없다는 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만일 수 있겠지만, 내게는 축복에 가깝다.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로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 아름다운 광경은 없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이나 공연장을 나와서도 우리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할 것이다. 

  • 오직 현악만이, 'Concerto Grosso no.2'에서 흘러나오는 현악만이 내게 무언의 위로를 들려줬다. 괜찮다고. 질문만 존재하는 삶이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 운세라는 건 반경 0.5킬로미터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운세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 수 있느냐, 없는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 더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나기를, 그리고 그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고 대답했다. (...) 그처럼 단 한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 그날 아침, 내 몸의 감각이 완전히 열리기 전까지 나는 1년여 그렇게 불합리의 터널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형태와 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좌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걸. 내 절망과 좌절은 과거에 있거나, 두려움과 공포는 미래에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적 세계뿐이라는 걸.

  •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그레이트 하우스>
    "제가 선택한 삶, 타인의 자리가 거의 없는 삶이요,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를 엮고 지내는 그런 관계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삶이라면, 그런 고립된 삶을 살면서까지 쓰고 싶었던 글을 실제로 쓸 수 있을 때만 납득이 되겠죠. 그런 삶의 조건이 고난이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일 거예요. 제 속의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저를 그런 부대낌에서 비껴나게 했고, 우연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보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의미가 충만한 허구를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논리와 흐름에 제 생각을 맞춰야만 하는 고된 소통보다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유를 선호하게 했죠."

  • 고통에 관한 한, 보스턴마라톤을 7회나 우승한 클래런스 드마르의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필사적으로 달려서 고통을 없애 버려라. Run like hell and get the agony over with." 멋진 말이다. "hell"이란 단어 속에 이미 끔찍한 고통의 의미가 들어 있으니 달리기로 미리 엄청난 고통을 불러일으켜 자잘한 고통 따위는 삼켜 버리라는 뜻이 담겼다.

  • 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한 일이다.

  • 한없이 미워해 보지도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도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는 필경 둘 중의 하나다. 사랑하지 않거나 죽었거나.

  • 온몸을 던져서 정신 번쩍 차리고 남들이 갔던 가시밭길을 몸으로 다 겪고 나서도 넘지 못하는 그 벽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몸이 생각을 그친 곳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비로소 상상한다.

  • 인류는 상상력을 통해서 세계를 바꿔 왔다고 하지만, 세계 자체가 변한 것은 없다. 원래 지구가 태양을 돌았으며 석유는 땅속에 묻혀 있었으며 신대륙은 대서양 저편에 있었다. 변한 것은 세게를 감지하는 우리 몸의 체계다. 그러므로 다들 먼저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보기를.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때 다시 한 번 상상력에 대해 말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마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왜 상상력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전기가 실패담으로 가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한번 위로 걷어차본 익스트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밑줄 치며 볼 문장이 많은 책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지만 우리는 결국 부대끼며 살아야된다는 점을 공감하는 사람도 좋아할 것이다. 독서노트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들어올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지워질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너무 감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