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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Book_스크류테이프의 편지 writen by C.S.루이스 1/2

나니아 연대기로 더 유명한 작가 겸 신학자 C.S 루이스 의 스크류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있다. 스크류테이프라는 악마가 그의 조카악마 웜우드에게 편지 형식으로 어떻게 ‘예수쟁이’들 혹은 인간들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가에 대해 조언한다. 1인칭 악마 시점으로 쓰인 덕에 책 전체가 반어법, 풍자로 가득하다. 그들의 충고를 한번씩 뒤집어 받아들여야하는데 가끔 어려운 번역투 문장에서는 뭐가 옳은지 헷갈릴 때가 있다. 

위기의 그리스도인들, 반그리스도인 들을 정조준한 묵직한 한방을 장마다 날려 뜨끔/불쾌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그들의 마음 속에 회심의 가능성, 최소한의 믿음을 보장해주는 자연스러운 불쾌함이라고 보고싶다. 타인을 정죄함, 미래에 대한 불안함, 지나친 자기애 감정, 뜨내기스러운 쾌락주의/경박함, 잘못된 겸손함은 악마들에게 얼마나 유용한 무기로 쓰이는가, 또 인간들은 얼마나 속절없이 그런 공격에 당하고 마는지.

 


그러니까 실망감이란 삶의 모든 부분에서 꿈으로만 간직해왔던 야심을 힘겨운 실천으로 옮길 때 나타나는 표시인 게야.


다른 환자의 머리 속에 이런 질문만 떠오르지 못하게 하면 돼. ‘ 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만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이런 버릇을 잘 들여놓기만 하면, 자기가 먼저 불쾌한 말을 해 놓고서도 상대가 언짢은 내색을 한다고 도리어 서운해하는 유쾌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최선의 방책은 진지하게 기도할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 보는거다. ...앵무새처럼 따라 기도하던 버릇을 기억해 내도록 부추기거나...그러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제야말로 완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이며 규칙에 매이지 않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거든. 초심자가 이런 생각을 할 경우, 사실은 의지와 지성을 집중시키지 않은 채 막연하게 경건한 기분만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꼴이 되는데도 말이야.


잊지 말거라. 인간들은 자신이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가 하는 짓들이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노상 잊고 산다. 그들은 악마가 자기네 마음 속에 이런저런 것들을 불어널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만,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최대 과업은 그들의 마음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냐.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런 재난을 통해 수천 명의 인간들이 원수에게 돌아서는 꼴을 보게 될 수도 있고, 혹 그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이때껏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수만 명의 인간들이 자아보다 고귀하다고 믿는 가치와 명분에 눈길을 돌릴 수도 있지. ... 설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이 원수의 본부에 구원을 요청하기만 하면 그의 요새는 거의 언제나 보호받게 되어 있다.


우리야 환자의 앞날이 불확실할수록 좋지. 서로 충돌ㄹ하는 미래의 모습들이 마음을 온통 채운 채 희망이나 두려움을 번갈아가며 불러일으킬 테니까. 우너수가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기에 불안과 걱정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원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바라지만, 우리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따라서 네 임무는 환자가 현재의 두려움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생각을 절대 못 하게 하는 한편, 오로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에만 줄창 매달려 있도록 조처하는 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일들이야말로 제 십자가라고 믿게 만들거라. 그렇게 서로 어긋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환자의 뇌리에서 싹 지워 버리고, 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일에만 미리 마음을 굳게 다지며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애쓰게 하거라. 열 가지도 넘게 가정해 놓은 서로 다른 운명들을 진짜로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그런 일을 하려고 덤비는 인간들에게는 원수도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현재 실제로 겪고 있는 고난이라면야 아무리 두렵다 해도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대개는 원수도 직접 개입해서 도와 주지만 말이지.


‘환자의 심리가 우리 목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할 시에는 아무런 자각 없이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부추기되, 원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시에는 자신의 심리상태 그 자체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환자의 영혼에는 어느 정도의 악의와 함께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현대인들은 ‘악마’를 대체로 희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한다는 사실이 힘이 될 게다. 혹시라도 환자의 마음 속에 네가 정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희미하게라도 떠오를 시에는, 그 즉시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타이즈 입은 꼴 따위를 보여 주면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믿을 수 없으니 네 존재도 믿을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거라.


사람들이 싫어하고 무시하는 일로 뭉친 소집단은 내적으로는 서로 찬사를 주고 받는 온실 관계를 발전시키는 반면,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엄청난 교만과 증오를 키워 나가게 되지. 그들이 뻔뻔스럽게 이것을 즐기는 이유인즉슨, 자신들의 배후에 ‘대의’가 버티고 있으며 이 대의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게야.


인간은 양서류다. 반은 영이고 반은 동물이지. 그러니까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는 한편, 동물로서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육체와 정욕과 상상력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게야. 시간 안에 있다는 건 곧 변한다는 뜻이니까.


원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 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에도 의지와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물로 자라가는 게야. 그러니 이렇게 메마른 상태에서 올리는 기도야말로 원수를 가장 기쁘게 할 수밖에.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야.


기복의 법칙에 대해서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하게 하거라. 처음 회심했을 때 경험한 열정은 영원무궁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어야만 했다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건조함 역시 그와 똑같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믿게 하라구.


[절망적인 비관형]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요즘 같은 때엔 식은 죽 먹기야) 적당한 성경구절에 관심을 끈 다음,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 예전 감정을 회복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계속 하도록 부추길 수만 있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어.


[희망적인 낙관형]

현재의 영적 저기압 상태를 묵인하게 한 다음, 이런 상태도 뭐 그리 심각한 침체는 아니라고 스스로 설득해 가며 차츰 그 상태에 만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굔느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수치심이나 자존심이니 예절이니 허영 같은 것들만 잘 건드린다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야. 지연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환자는 자꾸 진심을 가장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게다. 말을 해야 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침묵해야 할 때는 웃어 버리겠지. 자신은 동조하지 않는 온갖 종류의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들을 처음에는 이렇게 행동으로만 인정하겠지만 결국에는 입으로도 인정하게 될 테고. 네가 잘 다루기만 하면 그런 태도들을 아예 환자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했던 대로 변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인간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려고 할 떄, ‘매사를 농담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동료들에게 비난은커녕 경탄까지 받아가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수천 마디 음담패설이나 신성모독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게야.


Without whom Nothing is strong.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야말로 정말 강하고말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슬쩍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인간은 달콤한 죄도 못 되는 것.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왜 하는지도 모를 것에 미적지근하니 관심을 보이다말다 하거나 자기도 잘 모르는 어렴풋한 호기심을 채워보다가, 손장난이나 발장난을 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곡조를 흥얼거리다가, 혹은 흥미로운 욕망이나 야망이 자극된 것이 아닌데도 일단 우연히라도 발을 디디고 나면 도저히 빠져 나오기 힘든, 그 길고도 어둑한 목상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인생을 낭비한다. 인간이란 그만큼 혼미해지기 쉬운 약한 족속들이야.


사실 가낭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데다가 갈랫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


원수가 자아를 버리라는 건 아집으로 소리치고 주장하기를 그만두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집을 버리고 나면 진짜 각자의 개성을 전부 돌려준다구. 원수는 인간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정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구 큰소리친다.(불행히도 이건 원수의 진심이지)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번복할수록 약하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겸손이라는 미덕 자체에 관심을 고정시키는 것의 위험]

원수는 겸손을 통해서도 인간이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원수와 이웃을 향하게 되길 바라지. 자괴감이나 자기 혐오의 감정들도 길게 보면 결국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들이야. 그러니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해로울 게 없다. 인간이 계속 자기에 대한 생각에 갇히게 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경멸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른 인간들을 경멸하는 자리로 나아가며 우울함과 냉소주의와 잔인함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우리한테는 외려 이득이지.


[겸손이란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하 낮은 평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


원수는 결국 인간이 자신에게 유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이웃이 가진 재능을 볼 때와 똑같이, 해 뜨는 광경이나 코끼리나 폭포수를 볼 때와 똑같이, 자신의 재능 또한 솔직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길 바라는 거다.


[동물적인 자기사랑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자기사랑 –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자아를 향한 사랑과 감사 –를 회복시키려 한다]